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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잡러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본 건 2017년 즈음이다. 2017년 6월 1일, 바로 하루 전인 5월 31일에 내 인생 마지막 퇴사를 하고 다음날 바로 3번째 사업자등록증을 받았다.

마지막 퇴사를 결심한 건, 이전의 퇴사를 결심한 상황과 다른 점이 많았다. 41살에 퇴사를 결심하기엔 모아둔 자금도 없었고 한창 육아에 돈이 들어가는 시기였으니 6개월동안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회사업무의 압박, 계속 성과를 만들어야 되는 상황인데 회사 대표의 끊임없는 마이크로매니징은 그 동안 다른 회사에서 쌓아온 내 경력과 경험을 한순간에 무시하는 것 같았다.

마이크로매니징을 한다는 건, 나를 못 믿는다는 것이고 업무의 자율성과 성과를 중시하는 나에게는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IR자료 작성분량을 매일매일 검사받고 토시하나까지 간섭받으니, 대학원 다닐 때 내 논문을 퇴짜놓던 깐깐한 지도교수가 떠 오를 정도였다.

처음 겪어본 업무간섭에 대한 스트레스와 성과를 만들기 힘든 상황에서 어거지로 IR자료를 만들면서 매일매일이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직한지 2개월만에 퇴사를 떠올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전의 나는 단 한 번도 출근이 싫었던 적이 없었다.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나는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다음날 해야 되는 업무들이 빨리 하고 싶어서 늘 두근두근거리며 출근을 했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4개월동안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할 계획을 세우면서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압박을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워크넷에 올려둔 내 이력서를 하루에도 수십명이 열람만 할 뿐 연락 오는 곳은 없었다. 더 좁은 바닥인 제주도가 차라리 더 이직하기 쉬웠다. 그런데 8년만에 돌아온 고향 부산에서는 나를 원하는 곳이 없었다.

40이 넘은 나이, 연봉, 학력 등 나를 채용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제주도에서 회사생활을 할 때 마지막 직급은 이사였다. 그리고 연봉도 꽤 높았고, 석사 학위는 PMO로서 일할때 메리트가 높았다.

다니던 제주도에서 다니던 회사의 대표는 박사학위였고, 지원사업을 받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줄줄 써내려가던 나는 석사였으니 서류상으로도 이득이 많았다. 발에 차일만큼 많은게 석박사지만 그런 가방끈이 통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이직을 하려는 나에게 이런 것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끔 전화로 연락이 오는 곳은 항상 경력이나 경험으로 보자면 회사에 꼭 필요한데 학력과 연봉이 높아서 부담스럽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4달동안 10곳에서 연락을 받았지만, 그 회사들이 원하는 건 내가 적어놓은 희망연봉의 1/3 수준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업무의 수준이나 회사 내에서 원하는 역할은 내가 적어둔 연봉정도에서 받을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이해는 되지만 나는 연봉을 낮춰서까지 이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이 회사에도 제주도에서 받던 연봉의 30% 정도를 낮춰서 오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에서 내 역할은 IR자료를 만들고 회사 자금을 만들어오는 것이었다. 즉, 서류쪼가리로 돈을 만들어 오는 일이다.

원래 내가 하던 업무는 PMO였다. 정부지원사업이 있으면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지원금을 따내고, 회사가 굴러갈 수 있는 비용을 충당하는 일을 꽤 오래했었다.

운도 좋았고, 지역적인 특성으로 성과도 좋았다. 초기 제주도 이민자였던 나는 좁은 바닥에서 나름 잘 먹히는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작게는 몇 천 만원, 많게는 몇 억의 정부지원금을 받아왔고, 덕분에 내가 다닌 제주도의 향토 SI회사는 관공서 홈페이지나 어플리케이션을 외주받아서 먹고 살던 회사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ICT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좀비회사의 앵벌이꾼이라고 했지만, 내가 따낸 지원금으로 10여명의 직원들의 급여가 한 번도 밀리지 않고 제때에 나갔고, 회사도 성장을 이어나갔다. 직원들이 제일 좋아했던 건 외주업무로 야근을 안해도 된다는 점이었다.

한 번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최소한 일주일은 몇 백페이지의 사업계획서 작성하려고 컨소시엄 회사들과 마라톤 회의를 하고, 몇백잔의 싸구려 믹스커피를 마시며 잠 잘 시간에도 서류를 만든다.
최종발표날에 심사역들 앞에서 초긴장 상태로 사업계획을 발표하고 나면, 그 상태로 넉다운 된다.

이런 일을 매년 상반기, 하반기에 하고 지원을 받게 된 사업을 관리까지 전부 도맡아서 한다. 이게 내 일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지만 이 일이 재미있었고, 또 회사의 대표나 직원들의 응원도 받아가며 하는 일이라 보람도 컸다.

업무의 힘듬을 따지자면 어떤 일이든 누구든 자기가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한다고 하겠지만, 업무가 힘든 건 시간이 해결해준다. 태어나면서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 내가 부족한 부분은 노력으로 메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 인해 힘든 점은 누군가는 떠나야 끝나는 일이다.

대학원 선배의 추천으로 소개를 받아서 이직한 내 마지막 회사의 대표는 나를 마치 대학원 연구실의 연구원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본인이 대학교수여서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을거라 짐작은 미리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수준 그 이상이었다.

마이크로매니징이라는 단어도 그 때 알았다.

이건 사람의 성향이다.
내가 설득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몇 번의 충돌과 면담 끝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 회사는 나 포함 4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모두 개발자였고 내가 퇴사하고 난 뒤 1년 뒤에 모두 이 회사를 떠났다.)

더 이상 이렇게 버티면서 회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계속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2017년 5월31일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할일을 했다.

어느 글로벌 투자행사장에서 한국말, 중국말을 써가며 IR발표를 했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는 대표에게 그만둔다고 말하고 IR발표 행사장에서 헤어졌다.

뒤돌아서며 속이 후련하다는 기분보다는 귀싸대기를 한 대 후려갈기지 못했음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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